[북한철도 비밀노트-1화]남‧북 어색했던 첫 만남
특별열차 안에서 이루어진 남·북·러 철도운영실무회담
양정규 객원기자, 기사입력 2021-03-16 [09:00]
(기획특집 시리즈 남북철도 봄은 오는가) = 반세기 이상 단절되어 온 남북철도를 복원하기 위해 애써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측 인사들과 만나 실무협의를 하고 실제로 진행을 맡았던 실무자들의 생생한 이야기,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다양한 비화를 모아 전해드립니다. 남측과 북측이 나눴던 팽팽한 긴장감과 때론 따뜻하고도 찡했던 분위기를 느껴보세요.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 남북철도 복원의 역사 속으로 함께 떠나봅니다!=
[국토매일=양정규 객원기자/작가] 칼바람과 꽃샘추위를 이겨낸 봄이, 한반도의 남녘부터 북녘까지 훑어 오르며 꽃봉오리를 터뜨려주던 2006년 3월이었다.
여전히 강추위가 몰아치던 러시아 대륙의 한 기차 안에선 북한의 ‘인공기’와 러시아의 삼색기, 남한의 ‘태극기’가 마주 놓여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나홋카까지 달리는 특별열차 안이었다.
북한과 러시아, 남한의 철도 수뇌부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 연결 사업을 둘러싸고 치열한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국-러시아, 북한-러시아 고위 철도 당국자간 2자 회담은 있었지만 3개국이 동시에 한자리에서 만나기는 처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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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인공기 앞에는 북한의 김용삼 철도상이, 삼색기 앞에는 러시아 국영철도공사 야쿠닌 사장이, 태극기 앞에는 남한의 당시 한국철도공사(현 코레일) 이철 사장이 앉아 있었다. 당시 이 역사적인 현장에 동석했던 실무자 말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합의를 도출해 낸 회동이었지만 처음부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특히 남과 북 사이로 흐르던 묘한 분위기는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이었다. 얼굴을 알지 못한 채 떨어져 살던 반가운 핏줄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과 설렘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장벽에 둘러싸인 것 같은 긴장감과 답답함, 비슷하지만 어딘지 다른 그들을 마주 해야 하는 어색함 등이 뒤섞여진 마음이었다. 얼굴조차 서로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북한의 김용삼 철도상에게선 찬바람이 불었다. 어깨를 꼿꼿이 직각으로 편 채 앉은 그는 바짝 날이 선 채 언제라도 공격할 태세를 한 모습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의 옆에는 건장한 수행원이 그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를 보호하려는 것인지 감시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북측의 말과 행동은 무척 긴장되고 경직되어 있었다. 분위기상 그들은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말하고 서류에 사인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을 것이다. 합의서 서명시 반드시 평양에 그 내용을 회신 받아야 했을테니 말이다. 제 맘대로 했다가는 목숨을 내놔야할 수도 있을테니 충분히 그럴만 했다.
긴장감 속에서도 남·북·러 3자 철도운영자 대표들은 시베리아횡단철도와 한반도종단철도의 연결이 지연되는 사유에 대해 한반도 주변의 정치, 군사적 긴장 관계 때문이라는 사실을 공감하고 있었다.
이 역사적인 3자 회담이 이뤄지게 된 배경은 이철 한국철도공사 사장과 야쿠닌 러시아 국영철도 사장이 참석할 예정이었던 ‘TSR 활성화를 위한 국제포럼’에 김용삼 북한 철도상도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통보함으로써 성사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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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북한의 철도 연결 사업은 2004년 4월 모스크바에서 제1차 3개국 전문가회의가 열린 뒤 지지부진한 사업이었는데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난 후 남·북·러 3자 철도 전문가회의를 통해 이행 문제를 협의하기로 논의한 바가 있던 터였다. 혹자는 러시아측에서 김용삼 철도상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남·북·러 3자 수뇌부간 만남을 이끌어 낸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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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동은 남·북·러 3자 철도운영자 대표가 한자리에 모인 첫 회의로써 TKR-TSR 연계사업과 TKR의 개량을 위한 재정 확보 문제 등에 대해 논의가 됐다. TKR-TSR 연결과 TKR 재건에 대한 3국의 정확한 인식을 같이하고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를 이끌어냈다. 결과적으로 3국의 수뇌부가 모여 철도협력을 위한 3자 합의를 바탕으로 한 논의 결과를 러시아철도공사 사장 야쿠닌이 남·북·러 3자 회담 의장성명으로 발표하였고 이 사건은 이후 나진-핫산 프로젝트의 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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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김일성은 인민에게 철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철도가 운영되는 것은 인체에 비유하면 혈액이 순환되는 것과 같다. 철도가 잘 운영되어야만 공업과 농업 생산이 보장되고 경제건설이 빨리 추진될 수 있으며 또한 인민생활도 보장될 수 있다.”
북한의 ‘철도법’ (제1조)에서 조차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철도는 나라의 동맥이며 인민경제의 선행관이다.”
이처럼 철도는 북한에서 절대적이며 북한에게 있어 철도란 혈액과도 같다. 철도사업은 김일성의 유훈사업으로써 북한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업일 뿐 아니라 교통정책이 곧 철도정책이라 할 정도로 철도가 절대적인 운송수단이다. 철도가 대량수송이 가능하며 수송시간이 짧고 수송원가가 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철도는 안타깝게도 거의 반세기 전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분단 전까지만 해도 국제열차를 운행하며 남한보다 한발 앞서 나가던 북한이었다. 3자 회동 이후 북한의 노후화된 선로와 거북이 수준의 속도로 운행하는 기차들은 남측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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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순환되지 않은 채 막혀있던 한반도 혈맥과도 같은 철도를 연결하기 위해 남측이 나설 때였다. 남측에서는 남북철도열차 시범운행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북으로 갈 채비를 서둘렀다.
<이어 네째주 화요일에 계속>
[북한철도 비밀노트–2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제진역까지 열차 이송작전... 철마는 북으로 달리고 싶다
양정규 객원기자, 기사입력 2021-03-30 [09:00]
(기획특집 시리즈 남북철도 봄은 오는가) = 반세기 이상 단절되어 온 남북철도를 복원하기 위해 애써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측 인사들과 만나 실무협의를 하고 실제로 진행을 맡았던 실무자들의 생생한 이야기,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다양한 비화를 모아 전해드립니다. 남측과 북측이 나눴던 팽팽한 긴장감과 때론 따뜻하고도 찡했던 분위기를 느껴보세요.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 남북철도 복원의 역사 속으로 함께 떠나요! =
[국토매일=양정규 객원기자/작가] 2006년 5월 13일, 한반도는 55년 만에 드디어 녹슨 철마가 군사분계선을 넘게 될 거라는 희망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남북이 5월 25일 경의선과 동해선 남북철도를 시험운행하는 것에 전격 합의한 것이다.
개성공단내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에서 제12차 철도도로연결 실무접촉을 사흘간 벌인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대한민국 남측위원장엔 박병원 재정경제부차관이, 북측위원장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동찬 민족경제협력위원회 부위원장이 각각 서명란에 사인했다.
러시아 블라딕보스톡에서 지난 3월 남-북-러 철도운영자가 만나 TKR-TSR 연계를 지속적으로 논의하는데 동의한 이후 전략운영팀과 협력사업팀으로 구성된 남북철도사업단이 발족되었는데 이번 합의도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어서 실무자들은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열차 시험운행 절차와 방법으로는 열차시험운행 구간을 각각 경의선은 문산역부터 개성역까지, 동해선은 금강산역에서 제진역까지, 운행수단은 각각 디젤기관차와 객차 5량으로 정하고 경의선은 남측에서 시험운행을 주관, 동해선은 북측에서 시험운행을 주관하기로 합의했다. 또 승차 인원은 철도연결 관계자, 행사 내빈, 기자 등 남북 각각 100명으로 한정하고, 통신방식은 군사 당국 사이의 합의에 따를 것이며 운행에 필요한 거리표, 곡선표, 구배표, 시험운행구간 선로 일람표 등 시험열차운행에 필요한 자료 교환 또한 약속했다.
시험운행에 필요한 공사도 대부분 완료된 상태였기 때문에 모두들 실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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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경의선 동해선 철도연결구간 공사실태 공동점검은 이미 2005년 7월 당시 제5차 철도·도로 실무협의회 합의에 따라 진행된 바 있었다. 남과 북 실무자 각각 15명이 참가하여 도보로 노반, 구조물, 교량, 전기, 통신, 운전취급 등에 관해 공동으로 조사했던 것이다.
당시 조사단의 보고에 따르면 북측구간(개성, 금강산)을 우리측 기술 기준으로 선로를 부설하여 열차 개통 전 부분적으로 보강할 문제가 대부분으로 열차 운행에는 큰 지장이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역사 건물은 신축 또는 리모델링 중으로 철도개통 전 조속히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남북철도 연결구간에 대해 남과 북이 공동으로 점검한 적이 있어 남과 북 양측은 합의에 따라 5월 25일 남북철도 열차시험운행을 하게 될 역사적인 그날만을 기대하며 전력을 다해 행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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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갑자기 결정된 제진역 열차 배치는 실행에 옮기기에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강릉역에서 제진역까지 118km 구간에 아직 선로가 없기 때문이다. 전략운영팀장은 제진역까지 열차를 이송하기 위한 방법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검토 결과 강릉역까지 이송한 후 트레일러를 이용하여 육로로 이용하는 방법은 3일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측됐다. 열차를 조성하여 북측구간을 경유하는 방법으로 경의선-청년이천선-강원선-동해북부선을 경유하여 제진역으로 이송하는 방법은 약 27시간 소요될 것으로 보여졌다. 하지만 북측구간을 경유하는 방법은 또 다른 협의가 필요하여 불가능했다.
결국 부산에 있는 빈바지선을 빌려온 뒤 동해항구에 가져와 열차를 싣고 제진역 바로 밑 대진항으로 옮겨간 다음 트레일러로 제진역까지 이송, 긴박하고 일사분란한 작업 끝에, 열차를 선로에 배치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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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운행을 위한 마지막 기술적 협의가 5월 22일 완료되었다. 시험운행 전 선로점검을 위한 궤도점검차를 운행하기로 하고 군사분계선에서는 북측구간만 점검했다. 열차시험운행 때에는 기관사는 기관차에 탑승하여 자기측 구간 운전을 안내하기로 했다. 판문, 손하역은 신호기를 사용하기로 하고 개성역은 수신호로 열차를 취급하기로 했는데 남과 북측 승강장과 객차 사이 높이가 일치하지 않아 별도의 발판을 준비하는 등 시험운행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순조롭게 되어갔다.
그런데 당시 동해선(제진-금강산)측 담당자였던 남북철도사업단 전략기획팀장은 5월23일 저녁 무렵부터 이상기류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5월 24일 북측에서 중대발표를 하겠다는 말을 들은 터라 혹시나, 하는 마음과 설마, 하는 마음이 교차하며 불안해졌다고 한다. 북측의 철도성에서도 시험열차운행 하루 전까지 열심히 준비하는 것이 목격되었고 북측의 철도 실무자들 또한 얼마나 큰 의욕을 가지고 남북철도연결을 추진하고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벌어졌다. 행사를 하루 앞둔 5월 24일, 모든 정규방송이 중단되고 뉴스 속보가 전해졌다. 동해선을 향해가던 차를 고속도로 휴게소에 잠시 멈춰 세운 채 뉴스 속보에 귀를 기울였다. 믿기 힘든 소식이었다. 북한의 일방적인 취소 통보였다. 군사보장 조치 미비를 이유로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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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남북철도 최초 개통에 대한 꿈을 바로 눈앞에 둔 터라 그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참담했다. 동승 했던 동료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거운 침묵과 탄식뿐이었다. 향후 일정조차 기약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측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제진-군사분계선간 열차가 준비 되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운행을 자체적으로 실시한다면 북측에 우리의 열차운행 열망이 전해질 뿐 아니라 남측 신설구간에 대한 사전운행 학습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 자체 운행을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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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측은 이후 제진역으로 이송한 차량을 이용하여, 분야별 시스템 (분기기, 신호, 통신, 지장물 저촉 여부, 운영 등)의 상호 유기적인 작동 여부를 확인하고 언제라도 다시 재개될지 모르는 남북간 열차 시험운행에 사전 대비하여 동해선 남측 철도연결구간 시운전을 시행했다.
철도공사, 철도공단, 건교부, 통일부, 국정원관계자 등이 참가한 가운데 제진역↔남방한계선(5.0km) 구간에서 실제로 운행했는데 디젤기관차 4460+새마을호객차 (4량)+발전차(1량)을 투입, 기관차 단독운전 2회, 열차편성 2회 운행되었다.
남측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공식적인 반응은 전혀 없었다. 분계선 부근에 살고 있던 야생동물들만 처음 접하는 기관차 소리에 반응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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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머리를 맞댔던 합의는 하룻밤 꿈인 듯 느껴졌다. 철조망 하나만을 사이에 둔 이 짧은 철로 위에 언제쯤이면 철마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을 것인지 그 누구도 쉽게 장담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이어 둘째주 화요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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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철도 비밀노트–3화] 평화와 화해의 시대로
꾸준히 준비되어 온 남북철도
양정규 객원기자, 기사입력 2021-04-13 [09:00]
(기획특집 시리즈 남북철도 봄은 오는가) = 반세기 이상 단절되어 온 남북철도를 복원하기 위해 애써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측 인사들과 만나 실무협의를 하고 실제로 진행을 맡았던 실무자들의 생생한 이야기,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다양한 비화를 모아 전해드립니다. 남측과 북측이 나눴던 팽팽한 긴장감과 때론 따뜻하고도 찡했던 분위기를 느껴보세요.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 남북철도 복원의 역사 속으로 함께 떠나요! =
[국토매일=양정규 객원기자/작가] 조지W. 부시 미국 대통령이 경의선 복원에 쓰일 철도 침목에 직접 사인하자, 전 세계에서 모여든 취재기자들이 일제히 카메라 프레시를 터트렸다. 2002년 2월 20일, 도라산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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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산역은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700여m 떨어져 있는 경의선의 남쪽 마지막역으로, 이날 이곳에서 만난 한미 두 정상은 남과 북의 통일을 기원하는 연설을 한 후 비무장지대 철책선을 바라보며 경의선 복구상황을 보고 받았다.
이날 행사를 위해 김대중 전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열차를 타고 임진강을 건너 도라산역에 도착하는가하면, 한미연합사령관 뿐 아니라 경의선이 끊기기 바로 직전, 마지막 경의선 기관차를 운전했던 한준기씨 등도 참석하여 이날 행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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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전세계가 주목했던 ‘경의선 연결’은 단순히 철길을 연결한 ‘사실’이 아닌, 분단된 남북간의 협력과 화해의 상징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햇볕정책 덕분에 남북간 화해무드가 조성되어 통일에 대한 기대가 최고조에 이르던 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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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이상 잡초만 무성하던 경의선에 훈풍이 불기 시작한 때는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부터였다. 평양에서 발표된 6·15 남북공동선언은 8·15 광복 이후 남북 최고 지도자가 합의한 최초의 선언으로 그 의미가 더욱 컸다.
벼랑 끝의 고양이와 쥐처럼 긴장 상태를 유지하던 남과 북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웃으며 손을 맞잡은 한 장의 사진은 전 세계인들의 관심과 응원을 받기에 충분했다.
같은 해 7월과 8월 제주도에서 개최된 제1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도 ‘남과 북은 경의선 철도의 끊어진 구간을 연결하며, 이를 위한 문제는 빠른 시일 내에 협의하기로 한다’는 조항을 넣음으로써 남북철도 복원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경의선 연결공사 사업은 2000년 9월18일 기공식을 기점으로 본격 추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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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의 경우 당시 건설교통부(지금의 국토교통부) 밑에 철도청이 따로 있었는데 철도청에서 건설과 운영을 모두 담당했기 때문에 경의선 연결지침을 건설교통부가 철도청에게 주어 ‘남북철도연결 건설사업단‘이라는 전담조직을 출범시켰다.
남과 북은 경의선 복원에 대한 세부계획이 필요했다. 남과 북을 오가는 문제가 까다로웠으므로 남북 양측은 해당 지역 철도연결공사를 직접 시공하되, 상호 합류하여 시공하고 수시로 교류하기로 합의했다.
남측구간의 경우 철도청의 발주로 문산역-임진강 교량 간 9km 연결이 시행되었고 궤도부설 및 전기·신호 공사는 철도청이, 임진강 교량-군사분계선 간 3km에 대한 토공 등 노반공사, 그리고 군사시설 및 지뢰 등 지하매설물 처리는 우리 군이 맡기로 했다.
남북철도 연결과 관련된 실시설계, 용지매입 등은 이미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1단계로 문산-봉동까지 단선철도, 2단계 문산-개성간 단선 전철화, 3단계 문산-신의주간 복선 전철화를 목적으로 사업계획을 수립, 추진해 나갔다.
북측구간은 노반공사 및 궤도공사 등을 북측에서 직접 시행하는 한편 레일, 침목 등 주요자재는 남측에서 지원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궤도부설, 전기·신호 공사는 안전운행과 관련되므로 우리측 고급 기술자들이 북측과 함께 감리시행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측은 초기부터 진행이 매끄럽지 못했다.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공사가 중단되는가 하면 이후 후속 합의가 제대로 없었다면서 공사를 아예 중단해버렸다. 남북철도 복원사업은 한쪽만의 실행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에 북측을 끈질기게 설득해야만 했다.
그 결과 2001년 9월15일 제5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서울-신의주' 사이의 철도를 우선적으로 개통하는 것을 합의해 냄으로써 하나둘씩 차근차근 진척시켜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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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은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압록강까지 자유롭게 왕래하던 철길이었다. 휴전으로 인해 비무장지대가 들어서면서 잡초만 무성히 자라던 곳이었는데 경의선 연결 일부 구간인 문산-임진강역까지 공사가 완료됨에 따라 2002년 9월 30일 임진강역까지 주중 매일 5회, 주말 및 공휴일에는 매일 9회 왕복 운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정밀안전진단 당시 경기북부지역 수해로 인해 임진강철교 구간 중 변형되거나 부식된 구간이 발견되어 전면교체 했고 문산터널은 일부 구간에서 발생한 누수 관련한 보수와 터널 내부 배수시설 정비를 완료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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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초기 철도 복원사업 대상은 경의선 뿐 아니라 경원선, 금강산선, 동해북부선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탄리부터 평강간을 잇는 경원선의 경우 동해안 대북물자 소송에 유리하며 나진, 선봉지역과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을 통한 유라시아 수송로를 확보하는데 필요한 구간이었다.
철원에서 내금강을 잇는 금강산선의 경우 금강산 관광과 관련하여 수익성 있는 독립노선으로 개발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강릉에서 대진간 타당성조사를 완료한 동해북부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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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이나 동해선보다는 경원선 연결이 더 시급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경원선은 철원지구쪽이 군사적으로 긴장감이 높은 반면, 경의선의 경우 서해안 공단개발 지원 및 대북물자 수송에 유리하고 남북한의 수도인 서울과 개성을 통과하는 주간선을 연결한다는 상징적 효과가 컸기 때문에 먼저 선택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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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선은 2002년 4월 특사 방북시 동해선의 철도·도로 연결을 합의함에 따라 2002년 9월18일 철도의 날에 남북한 동시 착공식을 함으로써 시작 되었으며, 2003년 6월 14일 군사분계선(MDL)상에서 역사적인 남북철도 연결행사를 진행하게 된다.
동해선 기공식 당시 참석했던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북측은 철도관련 행사에 대한 엄청난 부담이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남측에서는 전문 장비들을 동원하여 발표를 진행한 반면, 북측은 전문 장비 없이 삽자루에 새끼를 매어 양쪽 사람이 손으로 당기면서 흙을 퍼내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측량을 하더라도 남측에서는 첨단 측량 장비를 이용했지만 북측은 일제강점기 때 사용하던 방식, 즉 사람이 직접 몸을 움직여 재는 재래식 방법을 썼다. 하나부터 열까지가 수준 차이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이 무척 강했던 북측은 남측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당시 남북철도 복원사업의 최종 목표는 대륙횡단철도였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기간인 1999년 6월부터 청와대 경제수석실 건설교통부 비서실로 파견됐던 한 관계자에 따르면 남북철도 연결을 통해 남한의 국민들도 TSR을 이용해 유럽까지 가는 것이 김대중 전대통령의 원대한 꿈이었다고 한다. 철도로 대륙횡단이 가능하려면 당연히 남과 북의 철도를 연결해야 하는 일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과 북의 철도는 갈라져 운행된 시간만큼 각각 서로 다른 형태로 변모해 있었다. 남과 북의 철도시스템, 통신계통이나 신호 차이, 부품 제품의 표준화 등 차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운행시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요인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북한철도는 화물수송의 90%, 여객수송의 50%를 철도가 분담하는 주철종도(主鐵從道)의 철도 중심의 운송시스템이었고 철도 총연장은 5235km로서 남측(3392km)보다 긴 철도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복선구간보다 단선구간이 월등히 많아 효율성이 떨어져 개보수가 시급한 것으로 파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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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가장 큰 장애물은 북한철도의 노후화였다. 남한의 철도는 적극적인 투자와 기술 도입 등으로 최고속도 300km/h를 자랑하는 고속철도로 발전한 반면, 북한 철도는 오랜 경제난으로 제대로 보수 유지가 되지 않아 20km/h 이하인 구간이 상당수였다.
철길이 연결된다 하더라도 남측 기관차가 북측 철길로 넘어갔을 때 북측의 철길과 시설이 남측 기관차의 하중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대두됐다.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대부분이 우리와 같은 표준궤(1435mm)로 부설되어 있어 궤간차이에 따른 운행지장은 없다는 것이었다.
2004년 4월 개성에서 열린 남북철도 도로 연결실무협의회 제4차 회의에서 채택된 ‘남북 사이의 열차 운행에 관한 기본합의서’에서는 열차의 안전, 철도 직원과 승객을 포함한 모든 인원들의 신변안전과 편의를 보장하고 열차의 정상적인 운행을 위한 규정 운영상의 차이 해소, 시설 완비를 위해 공동 노력하기 위한 방안을 명시했다.
이 기본합의서를 통해 남과 북은 열차의 정상 운영을 위한 규정 뿐 아니라 분계역장간 소통 관련, 사고 발생시 책임 문제, 차량 고장시 지원 방안, 통신설비의 주파수 공동 사용 운칙 등 열차운행을 위한 세부사항 등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하였다.
한반도 전역엔 평화와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전문가들은, 경의선 일부 구간인 개성-평양 구간의 교량 부분이 완벽하지 않아 약간의 보강이 필요하지만 열차 속도를 낮춘다면 평양까지 가는 것은 문제없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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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남북철도가 연결되자 도라산역은 이제 더이상 남쪽의 마지막역이 아니었다.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으로서의 준비가 된 것이다.
철도연결 복원사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던 철도실무진들은 도라산역에 퍼질 힘찬 기적소리를 기대하며 변화무쌍한 세계정세와 북측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북한철도 비밀노트–4화] 한반도 혈맥을 완전히 연결하다
남북열차 시험운행, 이번엔 진짜 성사될까?
양정규 객원기자, 기사입력 2021-04-27 [07:43]
(기획특집 시리즈 남북철도 봄은 오는가) = 반세기 이상 단절되어 온 남북철도를 복원하기 위해 애써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측 인사들과 만나 실무협의를 하고 실제로 진행을 맡았던 실무자들의 생생한 이야기,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다양한 비화를 모아 전해드립니다. 남측과 북측이 나눴던 팽팽한 긴장감과 때론 따뜻하고도 찡했던 분위기를 느껴보세요.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 남북철도 복원의 역사 속으로 함께 떠나요! =
[국토매일=양정규 객원기자/작가] 2006년 2월부터 남북철도·도로 연결사업의 실무를 책임졌던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큰 기대를 품었던 2006년 5월 25일 행사가 하루 전날, 북측의 일방적인 취소 통보로 무산된 일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이 멍했어요. 북한의 협상 파트너들 얼굴도 보기 싫어질 정도였죠. 하지만 곧바로 더욱 철저히 준비하자고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종 점검차 2006년 5월 23일경 개성역 현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전혀 취소될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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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도 아랑곳없이 모든 철도 실무자들이 행사준비로 여념이 없었고 당시 북한 철도성 대협력국장이었던 박정성 남북회담 대표 책임자까지 역에 나와 마무리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조만간 쏠지도 모른다는 설왕설래가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 열심인 모습을 보고 나니 더욱 믿음이 생겨 상부에도 이상 없을 것 같다며 보고까지 마친 터였다.
그는 누구보다 허망한 마음이 컸다. 당에서 내린 결정이면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는 북측 실무자들의 허탈함 또한 대단히 컸을 거라 짐작된다.
서로는 남북관계와 세계정세가 좋아지면 언제든 또다시 기회가 생길거라는 희망을 품었다고 한다.
손 놓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남북철도 시험운행의 밑그림을 착실히 그려나갔다.
사실 궤도 연결은 모두 완료되어 시험운행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후 남과 북이 상시로 철도를 운행할 수 있으려면 해결해야 할 제반 사항이 여럿 남아 있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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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2006년 6월 3일~6일까지 제1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열려 경공업자재 지원문제와 열차시험운행을 연계하기로 합의가 됐다.
도중에 2006년 10월경 북한이 도발한 핵실험으로 인해 철도 자재 제공과 기술지원이 잠정 중단되기도 했지만 남과 북은 공식·비공식적으로 종종 만나 철도 관련 업무를 협의하고 진행할 수 있게 됐다.
남북간 합의 사항을 집행하는 사업은 주로 통일부가 했고 국토부가 지원하여 철도시설공단이 공사를 맡았다. 남측의 총괄 책임자는 남과 북을 오가며 철도 실무자들을 닦달했다고 한다.
불안한 국내외정세와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이뤄놓은 결과물들이 또 물거품이 될 것 같은 위기감이 앞섰기 때문이다.
북측 철도 실무자들 또한 이러한 위기감에 공감했고 남북 열차운행을 반드시 성사시키고 싶어 했다. 그들은 열성도 있었고 전문성도 모두 갖춘 사람들이었다.
우선 남북철도 운행에 대비한 철도역 신축과 북측의 시설 중 낙후된 역사에 대한 보수공사가 필요해 보였다. 북측엔 검수고나 차량 부대시설 등이 구비된 현대화된 역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북측의 경의선에는 판문역과 손하역을 신축하기로 하고 공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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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북측이 남측에게 개성역을 다른 역보다 더욱 크고 현대적인 역으로 리모델링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개성역은 원래 예쁘고 아담한 역이었는데 새로운 지어질 역사보다 개성역이 더 돋보이길 원했다.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방문했던 역이라는 점에서 개성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북측의 요청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개성역에 공을 들였다. 새로 지어진 다른 역보다 리모델링을 택한 개성역에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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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와 장비 등을 남측이 북측에게 차관형식으로 제공해 역사 공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공사 기간이 오래 걸렸다.
북측은 도로보다 철도가 주된 교통로인 반면, 남측에서 옮겨가야 할 자재와 장비들은 철도를 이용할 수 없어 모두 육로를 통해 차량으로 실어날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북철도 관련 공사는 계획대로 착착 진행돼 갔다. 하지만 다시 남북열차 시험운행이 성사되려면 무엇보다 군사보장 문제가 관건이었다. 실무자들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 준비한다하더라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성사되긴 어려웠다.
이 같은 고민은 2007년 4월 18일~22일까지 평양 고려호텔에서 열렸던 제13차 경제협력추진회에서 해결된다.
이 회의에서 경의선·동해선의 남북 철도연결구간에서의 열차시험운행을 5월 17일 실시하며 이를 위해 군사적 보장조치가 취해지도록 적극 협력하기로 하는 내용이 포함된 합의문이 발표된 것이다.
남과 북의 철도 실무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취소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진일보한 합의를 이끌어냈기 때문이었다.
이후 남과 북은 4월과 5월 두 차례 개성의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에서 남북철도·도로연결 실무접촉을 갖고 남북철도 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에 대한 더욱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행사준비에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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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경의선은 남측이 주도하고 동해선은 북측이 주도하여 진행하기로 했다. 전기, 통신 등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 기관차는 남북 동일하게 디젤기관차를 운행하기로 했는데 디젤기관차에 객차 4량, 발전차 1량을 편성했다.
운행구간은 경의선(26.8km)의 경우 남한인 문산역에서 출발하여 개성역까지 갔다가 다시 문산역으로 복귀(문산→임진강→도라산→(MDL)→판문→손하→개성→문산), 동해선(25.5km)의 경우 북한의 금강산역에서 출발하여 제진역까지 왔다가 다시 금강산역으로 복귀(금강산→삼일포→감호→(MDL)→ 제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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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방식은 남북철도 분계역간 폐색전화와 수신호를 병행하되 분계역간 열차 출발 5분 전후, 열차 도착 즉시 통보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운전속도는 남북관리구역내는 20~30km/h로 하되 평균 시속 40km/h이하를 준수할 것을 약속했다.
행사일이 다가오자 남측구간에 대한 사전 종합 점검을 먼저 실시했다. 경의선의 우리측 구간인 도라산역에서 군사분계선까지 약 1.8km과 동해선 남측구간인 제진역~군사분계선(7.0Km)에 대한 것이었는데 열차운행, 차량, 시설, 전기분야 등 철도운영의 각 분야에서 50여명의 인력이 투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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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검반은 도보로 이동하면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점검하는 것은 물론 검측 전용장비인 궤도검측차에 의한 선로검측도 실시했다. 발견된 문제점에 대한 보강작업 함께 진행하면서 절차상 순조로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의 1년 동안 방치됐던 제진역에 모처럼 우렁찬 경적소리가 울려퍼졌다. 시운전에 들어간 열차가 제진역에서 금강통문을 거쳐 군사분계선까지 7㎞ 구간을 3회 왕복하며 실제 운행에 대비했던 것이다.
동해선은 북한에서 주도하기로 한 행사이긴 하지만 행사의 안전과 성공적인 진행을 위해 시설공단 전문인력들도 궤도의 이상 유무와 전력가동 상황, 신호·통신 분야 등에 대해 실제 운행과 동일하게 확인·점검 작업을 벌였다.
열차 시험운행을 사흘 앞둔 날, 북한 역시 철로 보수 바쁜 북한 근로자들의 모습을 공개했다. 북측 출발역인 금강산청년역에서 보수 및 점검 작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 뒤로 건설 중인 이산가족 상설면회소가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 들뜨게 했다.
경의선은 우리 쪽에서 주도해야 할 행사였기 때문에 더욱 공을 들여 착실히 준비했다. 철도연결사업은 남북의 여객과 화물 등의 통행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통관, 출입국 관리, 검역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시설 또한 필요했다.
이러한 이유로 도라산역에 출입국관리시설(CIQ)을 설치하고 시험행사 당일인 5월 17일 공식적으로 오픈할 계획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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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즈음 또 문제가 생겼다. 남북은 당초 열차당 100명씩의 인원이 탑승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했지만 북측이 갑자기 “조촐하게 행사를 치르자”며 인원을 줄이자고 요구해온 것이다.
또다시 불길한 기운 드리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무산시킬 수 없다는 강한 의지로 개성에서 밤샘 협상을 벌였다.
결국 탑승 인원은 남측 100명씩, 북측은 50명씩으로 합의하고 운행 시각은 17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 까지 경의선과 동해선에서 동시에 시험운행 행사를 진행하기로 하는 등 열차 시험운행을 위한 세부계획을 담은 합의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남북은 이후 탑승자 명단을 교환하고 철도통신도 연결했다. 분계역 사이를 유무선으로 연결해 열차의 출발과 도착 등의 관련 사항을 직통 전화 등으로 상호 통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양측 분계역인 도라산역-판문역, 제진역-감호역 사이의 송수신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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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판 진통을 겪긴 했지만 남북철도 열차 시험운행을 하루 앞둔 전날 설렘과 기대로 가득했다. 특히 경의선의 첫 출발역인 문산역은 축제 분위기였다. 시험운행에 사용될 열차의 내부를 공개하고 함께 탑승할 승무원들도 안전운행을 다짐했다.
폭발물 탐지견이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를 대비한 선로 탐지를 하기도 했다. 시험운행에 대비한 예행연습도 가졌는데 일단 문산역에서 도라산역까지 달렸으며 탑승자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역 주민들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조금 늦은 감도 있지만 결국 진행이 된다니 다행스럽고 환영하며 앞으로 큰 발전을 위해 뭔가 이루어지길 바랐다. 행사장 앞쪽에는 '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 이라고 쓰인 간판이 설치된 무대가 들어서는 등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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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날씨가 좋지 않았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고 간간히 게릴라성 소나기까지 쏟아져 내렸다. 다음날 행사가 걱정스러워지는 상황이었다.
도로 주변에 설치된 한반도기와 환영 깃발들이 날이 개길 기다리며 나부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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